저출산과 의료 공백은 한국 사회의 오랜 난제다. 초저출산 국가로 접어든 지금, 인구 감소는 단순한 출산율 문제가 아니라 경제, 복지, 국방, 지역 격차까지 아우르는 복합 위기로 확산하고 있다. 여기에 더해 고령화로 인한 의료 수요 급증과 지역 간 의료 불균형은 국민 건강을 위협하는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정부 관계자와 의료, 인공지능(AI) 전문가가 모였다. 22일 경기도 성남시 판교 차바이오컴플렉스에서 열린 의료 AI 전문 컨퍼런스 ‘AWC 2025 in Seoul’에선 저출산과 의료 공백을 AI로 풀 수 있는 방안이 논의됐다.
올해로 9회째를 맞는 AWC in Seoul은 정보통신산업진흥원(NIPA)과 인공지능 전문매체 더에이아이(THE AI), 디지틀조선일보가 주최하고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후원하는 국내 대표 의료 AI 행사다. 올해는 차병원과 함께 ‘AI, 인류 난제를 풀다’라는 주제로 저출산과 의료 공백이라는 이중 과제를 중심에 두고, AI 기반 디지털 헬스케어 기술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는지 집중 조명했다.
◇ NIPA, 저출산 문제 극복 카드로 ‘기술’ 꺼내다
이번 행사는 정부 기관과 실제 의료 현장, AI 산업 핵심 주체들이 함께 모여 해법을 논의한 ‘의미 있는 움직임’으로 평가됐다. 특히 디지털 헬스케어의 가능성을 언급해 오던 정부가 저출산 등 한국 대표 문제를 푸는 방향으로 의료 AI 물꼬를 트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이번 행사는 의미가 있었다는 평가다.
개회사를 맡은 박윤규 정보통신산업진흥원(NIPA) 원장은 이 같은 움직임의 상징적 인물이다. 그는 “AI와 디지털 헬스케어 기술의 융합은 저출산과 고령화라는 구조적 위기를 돌파할 수 있는 전략 자산”이라며 “NIPA는 의료 AI 분야의 마중물 역할을 해오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본격적인 생태계 구축에 나설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 원장은 단순한 기술 개발이 아니라 실질적 의료 현장에 AI가 뿌리내릴 수 있도록 제도와 인식, 수요기관의 현장 적합성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이는 기술적 진보보다 더 어려운 ‘의료 현장의 변화’를 촉진하는 것이야말로 정부가 책임져야 할 부분임을 시사하는 발언이었다. 디지털 헬스케어가 여전히 제도적 장애물에 막혀 있는 한국 의료 현실에서, 정책 주체가 나서 생태계 기반을 만든다는 의지를 공식화한 셈이다.
차병원은 의료계 내부에서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보여줬다. 차의과학대학교 차원태 총장은 환영사를 통해 “AI는 의료와 생식의학 분야에서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단지 기술을 도입하는 수준을 넘어서 난임 진단, 배아 선별, 생식의학의 정밀 진단 체계에 AI를 통합한 실제 성과들을 공유했다.
차병원은 국내 시험관 아기 치료에서 높은 성공률을 기록하고 있으며, AI 기반 배아 분석, 정밀 진단 기준 설정 등 현장 실증 기반의 디지털 헬스케어 사례를 선도하고 있다. 이는 단순한 연구 중심이 아니라, 환자의 삶과 맞닿은 기술 활용이라는 점에서 더욱 설득력을 갖는다.
고정재 차의료원 난임센터 본부장도 기조연설에서 “시험관 아기 출생률이 전체 출생의 11%에 달하고, 난소 노화를 5년 지연시키는 기술이 갖는 사회적 파급력은 막대하다”며 “생식의학을 국가 전략 기술로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기술은 완성, 이젠 연결이 중요
행사에 참여한 기업들은 많은 기술이 준비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이 기술이 사회 문제 해결로 이어지기 위해선 보다 정교한 생태계가 필요하다는 데 의견이 모였다.
다쏘시스템의 자회사 메디데이터는 신약 개발의 결정적 병목인 임상시험 설계와 수행 문제를 AI로 해결하는 사례를 소개했다. 유재규 메디데이터 세일즈리더는 “전 세계 임상시험의 80%가 환자 모집에 어려움을 겪고 있으며, 그중 50%는 타깃 환자 확보에 실패한다”고 지적했다. 메디데이터는 3만 건이 넘는 임상 데이터와 100만 명 이상 환자 데이터를 기반으로, 환자 이탈 가능성을 예측하는 ‘환자 부담 인덱스’를 개발해 설계 초기부터 리스크를 줄이고 있다. 그는 “AI는 이 복잡한 퍼즐을 설계 단계부터 다시 짜는 도구”라며 임상시험의 실질적인 비용 절감과 성공률 제고에 기여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카카오헬스케어는 이번 행사에서 자사의 소아 건강 AI 상담 서비스 ‘닥터라이크(DR.LIKE)’를 최초 공개했다. 카카오톡 기반으로 운영되는 이 서비스는 현재 ‘모유 수유’와 ‘예방접종’에 대한 상담 기능을 갖추고 있으며, 향후 응급처치, 알레르기 예측, 성장/비만, 감염병 대응까지 확장할 계획이다. 신수용 CTO는 “카카오의 파운데이션 모델 ‘카나나(KANAN)’를 비롯해 다양한 고성능 AI 모델을 융합해 유연하게 개발 중”이라며 “병원 의료진의 검증을 거쳐 신뢰도를 높였다”고 밝혔다. 특히 NIPA 주관의 소아과 특화 AI 개발 과제의 일환으로, 총 26개 병원과 대학이 참여하는 대규모 협력 프로젝트라는 점에서 공공성과 확장성이 기대된다는 평가다.
‘AI+Femtech’ 기반의 저출산 대응을 주제로 한 패널토론에선 난임 문제 해결을 위한 AI 활용 논의가 활발했다. 김진영 베스트오브미 여성의원 원장은 “펨테크는 단순한 여성 건강 기술을 넘어, 국가적 과제인 저출산 문제 해결의 해법이 될 수 있다”며 사회적 연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실제 통계에 따르면 2023년 국내 난임 인구는 신생아 수를 넘어섰다. 김지훈 인트인 대표는 “AI 기반 조기 진단 기술을 통해 병원 방문 전 자가 판단이 가능해야 한다”고 제안했고, 이혜준 카이헬스 대표는 “비슷한 환자 사례를 AI가 제시하면 환자가 주도적으로 계획을 세울 수 있다”고 말했다. 장재환 휴먼스케이프 CTO는 “AI는 실시간으로 가임기 정보를 수치화해 맞춤형 상담을 제공할 수 있다”며 데이터 활용 가능성을 설명했다.
다만, 기술 발전과 별개로 의료 데이터의 표준화 부족과 폐쇄적 접근성은 여전히 큰 장벽으로 지적됐다. 오광신 에임넥스트 대표는 “병원 간 장비와 진단 기준이 달라 AI 훈련에 제약이 크다”며 데이터 통합 표준 마련을 강조했고, 장 CTO도 “보안과 프라이버시가 생태계 신뢰의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이혜준 대표는 “보건당국이 보유한 난임 데이터를 연구에 개방하지 않아 국내 AI 정확도가 떨어진다”며 제도적 한계를 지적했다.
국내 1세대 AI 연구자인 김진형 인공지능민간특별위원회 위원장은 “AI는 의료 인프라 부족을 보완하는 필수 인프라지만, 그 위에 제도, 데이터, 협력 구조가 함께 올라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출처: https://digitalchosun.dizzo.com/site/data/html_dir/2025/05/22/2025052280184.html